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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0(토)역사단편103-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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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jew
70
2 months agoSteemit3 min read

현대어에 친숙한 문구는 그대로 두고
한문이 많이 포함된 구절만 현대어로 옮긴다.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참조

인터넷등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검색하면,
비판하는 논조중의 하나가

영웅사관으로 한계가 뚜렷하다.
연개소문을 너무 부각시킨다.
신라를 평가절하하고 고구려만 편애한다."

같은 것들이다. 이런 비판은 당연히
'강단을 장악한 주류사학자들이다.

사실일까?
경주김씨인 김부식이래
1천년동안,
고구려-백제와 연개소문은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

김유신과 김춘추는 하늘처럼 떠받들고
연개소문은 폭정을 일삼다가 나라를 멸망시킨
깡패같은 역적으로 매도했다.

1천년간의 한반도의 학자들은
대부분 중화사상에 물들어
우리의 뛰어난 영웅과 역사를 매장했다.

그러다가,
신채호 선생같은 걸물이 출현하여
연개소문과 고구려, 백제의 영광을 들춰내니
식민사학의 역사관을 팔아서 먹고사는 주류사학계와
아마도 경주김씨 후손들 입장에서는
하나의 하늘아래 같이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필사적으로 신채호 선생을 매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1천년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우리 역사에 대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선생이
민족사학자인가?
정상적인 역사학자인가?

이윽고 고구려 경내(境內)에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태대대로개금(太大對盧盖金)을 보내
〔춘추 일행의〕 객사(客舍)를 정해주고,
연회를 열어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출처: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金庾信) 상 642년>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왕을 세운 연개소문을
김춘추 잠자리를 살펴주라고 보냈다는
이런 식의 천박한 헛소리로 뒤덮였던
우리의 소위 정통역사관
우리도 그렇게 배웠다.
연개소문은 패악무도한 인물이라고..

선생의 글을 읽어간다.

“『당서』가 비록 적국인의 저서이므로 무록(誣錄)이 많다 하나
어찌 연개소문의 사년이야 속였으랴.
중화 고대의 사가(史家)가 비록 인국 사정에 소격(疎隔)하다 하나,
어찌 목전에 전 중국의 공파(恐怕)를 주던 연개소문
의 죽은 해야 몰랐으랴”하여,
『당서』로써 연개소문의 사년을 확단하려는
이가 있겠지만, 이는 무리한 속단이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무록(誣錄): 꾸며낸 기록
소격(疎隔): 소통이 안됨
목전(目前); 눈앞
공파(恐怕): 두려움, 두려워하다.
휘닉(諱匿): 은폐하다
확단: 확정하여 단정함
속단: 경솔한 판단

(옮기면)

“『당서』가 비록 적인 나라에서 쓴 책이므로 꾸며낸 기록이 많다 하나
어찌 연개소문이 사망한 연도를 속였으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고대의 역사가가
비록 이웃나라의 사정에 어둡다고해도,
당시에 전 중국을 두렵게 하던
연개소문의 죽은 해야 몰랐으랴”하여,
『당서』로써 연개소문이 사망한 년도를 확정하려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무리한 경솔한 판단이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너무 순진하고 단순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문헌에 대한 비판적 고증이 필요하다.

계속 읽어본다.

당 태종의 죽음을 『당서』 태종본기나 유계전(劉洎傳)이나
『자치통감』으로 참조하여 보면,
요동에서 얻은병이며 그 병명은 양서의 소기가 각이하나,
이는 본국 전설(傳說)에 의하여
안시성(安市城)의 전창(箭瘡)됨이 명백하니,
마치 송 태종의 거란에게 맞은
전창(箭瘡)이 『양산묵담(兩山墨談)』에 보이었으나
『송사(宋史)』에 보이지 않음같이,
중화사에 당 태종의 전창을 휘닉(諱匿)하여
혹 병옹(病癰:肋膜炎[늑막염] ─ 原註[원주])이라 쓰며
혹 병리(病痢)라 썼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유계(劉洎): 당나라 개국공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전창(箭瘡): 화살에 맞아 생긴 종기
병리(病痢): 설사병

(옮기면)

당 태종의 죽음을 『당서』 태종본기나 유계전(劉洎傳)이나
『자치통감』을 참조하여 보면,
요동에서 얻은병이며
그 병명에 대한 두 책의 기록이 서로 다르지만,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생긴 종기가 명백하니,
마치 송 태종이 거란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생긴 종기가
『양산묵담(兩山墨談)』에 보였으나
『송사(宋史)』에 보이지 않는것처럼,
중화역사책에 당 태종의 전창을 은폐하여
병옹(病癰:늑막염 ─ 원주])이라 쓰거나
혹 병리(病痢)라 썼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관련 자료를 읽어본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고,
부상까지 당한 상태로 도망쳐온
당태종의 상황을 보여준다.

안시성전투.JPG

十二月,辛丑,上病癰,御步輦而行。
戊申,至幷州,太子爲上吮癰,扶輦步從者數日。
〈爲,于僞翻。吮,徐兗翻。從,才用翻。〉
辛亥,上疾瘳,百官皆賀。〈瘳,丑留翻。〉
<출처: 자치통감 호삼성, 권198 정관19년(645년)>

12월 신축일에 황제가 종기병(癰)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되었다.
무신일에 병주(幷州)에 도착하였고,
태자가 황제의 종기를 빨아 치료하고, 가마를 부축하며 며칠 동안 걸어서 따랐다
〈'爲'는 '위(僞)'로 읽는다.
'吮'은 '쉬옌(徐兗)'으로 읽는다.
'從'은 '才用(Cóng)'으로 읽는다.〉
신해일에 황제의 병이 나아 모든 신하들이 축하했다.
〈'瘳'는 '초우(丑留:Chōu)'로 읽는다.〉
<자치통감 卷198 정관19년(645)>

吮(전,연)': 빨다[ shǔn 로 발음]
吮癰 (연옹): 종기를 빨다
扶輦 (부련): 가마를 부축하다
서연(徐兗): [xúyǎn]은 슌(shǔn)으로 발음
步從 (보종): 걸어서 따르다
종(從): [Cóng]
재용(才用): [cáiyòng]은 Cóng[총]으로 발음
瘳(추):낫다 [chōu]
추류(丑留): [Chǒu liú]은 [chōu초우]로 발음

요즘처럼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세상에서도
신문기사도 100%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헌데,
사람빼고 전부 가짜를 만들어 낸다는 중화민족이
철천지 원수인 <연개소문>에 대해
제대로된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의심은 당연히 해야하고
그런 비판적 시각에 근거해서 역사기록을 읽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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