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2(일)역사단편244. 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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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무엇일까?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정신을 기록한 것이다.
김부식이 조금만 더 성의있게 기록을 했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명예를 얻었을 텐데..
선생의 글을 이어서 읽어본다.
그뿐 아니라 金富軾 以後(김부식이후) 五六百年 (5,6백년)만에
外國人의 手(외국인의 수)로 著作(저작)한
『盛京志성경지』·『直隸通志직예통지』 等 書(등 서)에도
高句麗 對 隋唐 戰爭(고구려대 수당전쟁)의 古蹟(고적)인
高麗城(고려성)·高麗營(고려영)·蓋蘇屯(개소둔)·
唐 太宗 陷馬處(당태종함마처)·謊糧臺 等(황량대 등)이
多數히 記載(다수히 기재)되었은 즉
金富軾의 當時(김부식의 당시)에는
史料(사료)될만한 古蹟(고적)이 더욱 豊富(풍부)하였을 것이니,
金富軾(김부식)이 遼宋에 往來(요송에 왕래)할 때
마음대로 收拾(수습)할 수 있을 것이며,
金富軾以後(김부식이후) 數百年(수백년) 곧
高麗 末葉에 著作(고려말엽에 저작)한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吏讀文의 詩歌(이두문의 시가)를 多數 揭載(다수게재)하였고,
李朝 初葉 編撰(이조 초엽 편선)한 『高麗史고려사』에는
高句麗(고구려)의 來遠城(내원성)과
百濟(백제)의 無等山(무등산)[兩種(양종)도 다 吏讀文(이두문)의 詩歌(시가)]를
그 意義(의의)를 解讀한 證據(해독한 증거)가 있은 즉
金富軾(김부식)의 때는
이보다 豊富(풍부)한 三國의 國詩(삼국의 국시)인
吏讀文의 詩歌(이두문의 시가)를 網羅(망라)할 수 있을 것이건만,
이는 다 金富軾(김부식)의 仇讐視(구원시)하는 바이요,
採錄(채록)코자 하는 史料(사료)가 아니다.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盛京志성경지: 성경통지(盛京通志)는 청나라때 편찬한 만주 지역의 지리지
1684년에 최초로 작성되고 1778년까지 증보판이 나왔다.
盛京(성경)은 현재의 요양성 瀋陽(심양)지역이다.
直隸通志직예통지: 청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이 속한 지역의 지리지다.
古蹟(고적): 문화등을 보여주는 옛터
謊糧臺(황량대): 식량으로 위장한 더미
陷馬處(함마처): 말이 빠진곳
遼宋(요송): 멀이 있는 송나라
收拾(수습): 흩어진 물건을 다시 정돈함
揭載(게재): 글을 싣다
編撰(편선): 엮어서 짓다
來遠城내원성:고려 때 궁중악으로 채택되었던 삼국속악 가운데 하나
작품의 제목과 그 유래만이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 전한다.
고려사의 관련기록을 본다.
[내원성(來遠城)은 정주(靜州)에 있으니 바로 물 가운데에 있는 땅이다.
오랑캐가 귀순해 오면 이곳에 배치하였으므로
그 성의 이름을 내원(=멀리서 오다)이라고 하고
노래를 불러서 기념하였다.]라고 되어있다.
網羅(망라): 널리 받아들여 모두 포함시킴, 물고기나 새를 잡는 그물
仇讐視(구원시): 원수처럼 보다
採錄(채록): 채택하여 기록함
(옮기면)
그뿐 아니라 김부식이후 5~6백년만에
외국인의 손으로 쓰여진 『성경지』·『직예통지』 등 책에도
고구려대 수당전쟁의 옛터인
고려성,고려영, 개소둔, 당태종말이 빠진 곳, 황량대 등이 많이 기록되었으니
김부식의 당시에는 사료될만한 흔적이 더욱 풍부하였을 것이니,
김부식이 먼 송나라에 왕래할 때 마음대로 정돈할 수 있을 것이며,
김부식이후 수백년 곧 고려말엽에 쓴 『삼국유사』에는
이두문의 시가詩歌를 여러개 실었고,
이조 초엽에 엮어 쓴 『고려사』에는
고구려의 ‘來遠城내원성’ 과 백제의 무등산[이 두 개도 다 이두문 시가]를
그 뜻을 해독한 증거가 있은 즉
김부식 당시에는 이보다 풍부한 삼국의 국시인
이두문으로 쓰여진 시가를 많이 포함시킬수 있었을 것인데,
이는 다 김부식이 원수처럼 대하는 것들이요,
채택해서 기록코자 하는 사료가 아니다.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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