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7(토)역사단편230. 북벌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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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옳다고 확신을 가지고 주위 분위기에 들떠서
앞뒤구분 못하고 날뛰게 되면
모든것을 망치게 된다.
틀려서가 아니라
그 시점에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맞고 틀린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도 고려시대 서경천도를 둘러싼 전쟁과
판단착오가 빚은 역사적 비극을 읽어간다.
그러면 어찌하여 妙淸(묘청)을 狂妄(광망)하다 하였는가?
睿宗本紀(예종본기)나 妙淸傳(묘청전)으로 보면
當時(당시) 稱帝北伐論에 傾向한 者(칭제북벌론에 경향한 자)가
거의 全國人의 半(전국인의 반)이 지나며
政治勢力의 中心(정치세력의 중심)인 君主 仁宗(군주인종)도
十의 九分(10의 9분)은 妙淸을 信(묘청을 신)하였다.
비록 金富軾(김부식), 文公裕等(문공유 등) 幾個人의 反對者(기개인의 반대자)가
外寇의 形勢(외구의 형세)를 盛히 鋪張(성히 포장)하며,
그 傳統的 事大主義(전통적 사대주의)의 壁壘를 固守(벽루를 고수)하려 하나
이를 攻破(공파)함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늘,
이제 이 같이 成熟한 時機(성숙한 시기)를 善用(선용)치 못하고
문득 金富軾의 一疏(김부식 1류)로 仁宗이 遷都의 計(인종이 천도의 계)를
停止함에 怒(정지함에 노)하여,
西京에서 兵을 擧(서경에서 병을 거)하고
天遣忠義軍(천견충의군)이라 自稱(자칭)하며
國號를 大爲(국호를 대위)라 하고 年號를 天開(연호를 천개)라 하고,
平壤을 上京으로 定(평양을 상경으로 정)하고
仁宗(인종)에게 上京 新闕로 移御(상경신궐로 이어)하여
그 國號(국호) 그 年號(연호)를 밧기를 求(구)하니,
그 時代人臣의 禮(시대인신의 예)로 그 얼마나 跋扈한 行動(발호한 행동)인가?
이 가티 跋扈(발호)한 行動을 取(행동을 취)할 것 가트면
반듯이 그 內部가 鞏固(내부가 공고)하고,
實力이 雄厚(실력이 웅후)한 뒤에 發表(발표)할 것이 아닌가?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독립기념관>
傾向(경향): 한쪽으로 기울어짐
仁宗(인종:재위 1122~1146 )고려 제17대 왕(1109~1146, )
鋪張(포장): 장식하다.
壁壘(벽루): 성벽과 보루
攻破(공파): 쳐부숨
善用(선용): 잘 활용하다
一疏(1류): 한번의 상소
天遣忠義軍(천견충의군): 하늘이 보낸 충성하고 절개있는 군대
고려 인종13년(1135),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우고 호칭하였던 군대의 이름
移御(이어): 임금의 거처를 옮김
跋扈(발호): 제멋대로 날뜀
鞏固(공고): 군고 튼튼함, 견고
雄厚(웅후): 강하고 풍부하다
(옮기면)
그러면 어찌하여 묘청을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않다 하였는가?
예종본기나 묘청전으로 보면
당시칭제북벌론에 경향한 자가
거의 전국인의 반이 지나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도 10의 9분은묘청을 신뢰하였다.
비록 김부식, 문공유 등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신하가
외구의 형세가 매우강한 것으로 포장하며,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성벽을 고수하려 했지만
이를 쳐부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늘,
이제 이 같이 성숙한 시기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문득 김부식의 한번 상소하여 인종이 천도계획을 정지함에 노하여,
서경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天遣忠義軍:하늘이 보낸 충성하고 절개있는 군대> 로 자칭하며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으로 정하고
인종에게 상경 새궁궐로 천도하여
그 국호,연호를 받기를 요청하니,
그 시대 신하의 예로 그 얼마나 제멋대로 날뛰는행동인가?
이 같은 난폭한 행동을 취하려면 반드시
그 내부가 견고하고, 실력이 강해진 뒤에
발표해야 할것이 아닌가?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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