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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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한국위원단이 국련사무총장에게 제출한 보고
4283년 6월 25일
본 위원단은 6월 25일 사변 발생 전의 배경적인 상세한 보고를 다음과 같이 제출합니다.
(1) 과거 2년간 북한 정권은 맹렬하고도 그릇된 선전으로 38선 전역에서 위협적인 태도로 대한민국 영토 내에 정부 전복 활동을 성원(聲援)하고 지지하여 국련 한국임시위원단의 보호 아래서 수립되고 국련 총회가 승인한 대한민국 정부를 약화시키고 파괴하려는 음모를 속행하여 왔습니다. 이 기간에 국련 한국위원단은 본 위원단의 합법성을 부정하고 본 위원단의 활동을 무익이라고 욕하고 본 위원단을 모욕하는 계속적인 선전방송의 목표가 되어 왔습니다. 이 활동은 신생 대한민국의 경제가 불안정하고 최초인 국회 심의가 가끔 험악하게 되고 행정이 위기에 처해지고 한 과거 8개월을 통하여 꾸준히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은 최근에 이르러 현저한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 초순에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은 북한원조를 받아 남한에서 준동하는 유격대에 대하여 그들이 월남하자마자 합계 600명의 2개 대대를 분쇄하는 등 동기 토벌의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국내 치안은 파괴 분자들의 숙청으로 강화되었습니다.
(2) 북한 정권이 방송 등 기타 선전으로 혹은 파괴 분자 원조로 5월 30일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갖은 수단을 다하였지만 본 위원단이 감시한 이 총선거는 합법적으로 질서있는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수행되었습니다.
(3) 국련 임시한위의 감시하에 1948년 5월에 선출된 대한민국 제1회 국회를 인계한 이 신 국회는 한국 남반부에서만 행하는 선거는 38선의 인공 경계선을 영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중간파 정당이 배척한 1948년도 총선거와는 판이한 것입니다. 지하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당이 1950년도 총선거에 참가하였으며 전 국회에서 가장 유력했던 여당, 야당의 2대 정당이 크게 패배하였으며 가장 의의 깊은 것은 1948년도 총선거를 배척한 중간파 인물들이 득세한 것입니다. 210명의 의원 가운데 무소속 의원이 130명이나 되는 신 국회는 1950년 6월 19일 경제적으로 견실한 국가에 유력하고 대표적인 정부 건설의 끊임없는 발전에 공헌한다는 희망에 가득찬 분위기 속에 소집되었으며 그 첫 회의에서 그들은 수다한 결점을 시정하기 위한 공정한 정신으로 행정에 열심히 이바지할 결심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4) 6월 초에 북한 정권의 평양 방송은 한국 통일의 대책 강화를 요구하는 논설을 공개하였으며, 6월 3일에는 530만 인민이 서명한 평화와 통일의 호소는 새로운 국토통일을 위한 전쟁의 개시를 의미한다는 콤뮤니케를 발표하였습니다.
(5) 6월 7일 평양 방송은 전 민주정권과 사회단체에 대하여 조국통일의 완수를 호소하는 민주전선의 호소문을 반복하여 방송하였는데 이 호소문은 추천된 자문위원회의 회의에 따라 전 한국을 통한 총선거를 행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6) 그 호소의 어조는 안보이사회를 배척하고 남한 정부의 요직에 있는 여러 지도자에 반역자 조건을 설정했고, 그 한국위원단의 통일 사업 간섭을 불허한다고 성명한 그들의 태도를 표면상 변경한 것같이 보였습니다. 한국위원단이 6월 10일 교서를 접수하기 위하여 또 3인의 북한 대표에게 본 위원단의 평화적인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개인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38선 너머로 대표를 파견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7) 이 북한 대표 3인은 한국의 전 정당에 보내는 그러나 사실은 일부의 지도적 정당과 정치요인에게 보내는 서류를 가지고 이튿날 남한에 왔습니다. 남한 당국은 즉시 3인을 구금하고 남한의 사실을 보임으로써 그들을 전환시키려 힘썼습니다. 북한 방송은 남한이 평화사절을 구금하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습니다.
본 위원단과의 회견에서 전기 3인은 남한 당국으로부터 훌륭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그들은 직접 목격한 바 남한 정치가들에 관하여 북한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북한 정권의 선량한 의도를 그들은 진심으로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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