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o Nutbox?

35【만.두.만.세】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해

2 comments

jamislee
81
2 years ago7 min read

11-1.jpg

“만두, 목마르지. 콜라 줄까, 생수 줄까?”
“물 주세요.”
사부는 생수통을 화장실 바닥 틈새로 밀어 넣는다. 좀 더 일찍 물어볼 걸 그랬나 싶지만, 지금이라도 생각한 게 다행이다. 만두가 안전한 것만을 신경쓰느라 미처 목마를 거라는 생각을 못한 거다.

“샘, 티슈 좀 더 주세요.”
“오, 그래.”

사부는 화장실 안쪽으로 티슈를 뽑아 건넨다.
한 방울, 두 방울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번진다. 순간 사부는 당황한다. 하지만 차분하게 상황을 살핀다. 별생각이 다 스쳐 지나가지만, 아닐 거라고 믿는다. 사부는 그동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부모로 물려받은 신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정원을 가꾸며 수없이 깨닫게 했다.
정원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수시로 만난다. 사부는 그들에게 꺾꽂이를 가르친다. 저 어린 것이 저 여린 것이 새로운 생명이 되려면 잘려야 한다. 꺾여야 한다. 시련을, 고난을, 아픔을 겪으면서 식물은 새 뿌리를 새잎을 틔워낸다. 잘려진 아기 식물은 엄마로부터 받은 아주 작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완성한다. 새로운 우주, 생명체로 태어난다. 식물은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씨앗을 심지 않고도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일에 아이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올해 자란 줄기를 자를 것. 두세 마디 줄기를 자를 것. 줄기에 붙은 잎은 한 두장만 남길 것, 그 잎마저 반 이상 잘라낼 것. 전지가위로 자를 때마다 식물은 아파한다. 하지만, 식물은 모든 아픔을 이겨낸다고 믿을 것. 나의 꽃, 나의 채소, 나의 나무로 와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 그러면 손에 쥐어진 보잘것없는 줄기가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뿌리도 마찬가지. 잎도 마찬가지 잘라서 꽂으면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이 된다. 식물은 절대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어린 생명은 새 뿌리를 내리고, 새잎이 틔워낸다. 기다리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고맙다, 사랑한다.’ 말해주면 식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앞산초등학교 텃밭정원에는 오백여종 십만 그루가 넘는 생명체가 어울려 자란다. 만두랑 사부가 오 년 동안 꺾꽂이로 가꾼 것이 대부분이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과 사부가 꺾꽂이로 심고 가꾼 거다.

만두만세-코피지혈.png

“다른 데 피나는 건 아니지.”
“걱정 마요, 코피예요.”

코피 날 때 하는 자세 일학년 때 배웠지. 기억해 봐. 똑바로 앉아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그래야 코피가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아. 코로 숨 쉬지 말고 입으로 숨 쉬어. 얼굴에 떨어져도 괜찮으니까 몸을 절대로 뒤로 젖히지 마. 티슈 뭉쳐 콧구멍에 넣지 마. 그건 코안 혈관을 자극할 수 있어. 티슈 다섯 장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 코 아래 받쳐. 코피는 가만 있으면 지가 알아서 스스로 굳는다고.
아? 여기 보건 선생님이 미리 준 스프레도 있다. 스프레이야. 받아. 콧구멍에 대고 세 번 정도 뿌려. 자 이제 코를 짚어. 눈썹아래 코뼈 아랫부분이야.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뼈를 눌러. 했어. 그럼 떼지 말고 오분 정도 있어야 해. 오분씩 세 번, 십오분 정도 걸릴 거야. 그러면 멈춘다고. 기다리는 동안 입학해서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려 봐. 떠 올렸으면 한 가지만 말해 봐.

“비 오는 날 놀았던 거요.”
“말하면 힘드니까, 그냥 듣기만 해.”
“......!”

20160407_115131.jpg

그래.
초여름이었어. 밤사이에 비가 많이 내렸지. 운동장에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많이 생겼거든. 아침에 빗줄기가 조금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보슬보슬 내렸지. 정원엔 수수꽃다리 향기가 가득했어. 라일락 아니냐고 물어보는 그 꽃은 수수꽃다리야. 파란 잎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피는 연보라 꽃이 무척 아름다웠어. 아주 강한 향기를 내뿜는 매력적인 꽃이지. 수수꽃다리들의 꽃은 길고 꿀샘이 깊어. 벌이 수정을 도와줄 수 없어. 그래서 열매가 매우 적게 맺혀. 그래서 우리 학교는 꺾꽂이를 하지. 많은 수수꽃다리를 만들어 이웃학교에 나눠주고 있어.
봄에 나눠주었던 나무뿌리가 수수꽃다리였어. 뿌리를 한 뼘 정도 잘라 땅에 묻었지. 지금쯤 꺾꽂이한 아기 수수꽃다리에서 여린 잎이 한두 개 나왔겠다.
만두, 넌 아기 수수꽃다리에 물을 열심히 주었지. 수수꽃다리는 물기가 촉촉한 모래흙을 좋아하지. 추위도 잘 견디는 멋진 나무야.
지난봄에 만두가 ‘나무미용실’을 차리고 친구들과 수수꽂다리 머리를 깎아주었지. 예쁜 모양으로 잘 깎았더라. 꽃이 진후 한 번 더 깎아주면 원하는 모양이 완성될 거야. 누구나 기르기 편한 꽃나무가 바로 수수꽃다리야.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나 가꿀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
오년 전 그날, 일학년 해반 한 친구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어. 그 친구는 종종 교실에 들어오지 않지. 개미에 꽂히면 개미를 관찰하느라, 공벌레에 꽂히면 공벌레와 노느라. 나비에 꽂히면 나비랑 노르라 그런 거지. 그날은 수수꽃다리에 꽂혀서 꽃만 바라보았어.
찐만두들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꽂혔지. 사부는 수수꽃다리에 꽂힌 친구를 교실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선택했어.
“물놀이하자.”
“ 와!”
찐만두들은 아이 좋아라, 마구 소리쳤지.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 신발을 벗고 첨벙거렸어. 금세 옷이 젖었어. 젖는 것쯤이야, 물방울이 얼굴에 튀는 것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더라. 하나, 둘씩 신발을 벗어 놓더니 신나게 놀더라. 우산대로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어. 우산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점점 더 큰 물길을 만들며 놀았지.
“댐 만들자.”
수수꽃다리에 꽂혀 있던 친구가 달려오며 외치더라.
모두 맨발 맨손이었어. 맨손으로 흙을 파 물길을 만들어 운동장의 물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어. 엄청난 공사였어.
사부는 그때, 긴급호출을 받았어. 교무실에 불려갔지. ‘지금 뭐 하고 있느냐?’라는 핀잔을 바가지로 들었어. 학부모 민원이 발생하면 어쩌자는 거였어. 학교를 빙 둘러싼 연립주택 창문에서 내다보고 전화 온다는 거야. 아이들이 비 오는 날 세 시간 째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고? 별반 선생, 미친 거 아니냐고?
일학년 별반, 사부네 반 학부모가 전화한 건 아니었어. 다른 반 엄마들이 은근히 부러워서 전화한 거였어, 전화 건 엄마 애는 교실에 갇혀 있는데, 별만이 엄청 부러웠던 거지. 별반 걱정하는 척하며 전화를 건 거야. 그것도 모르고, 아이들 당장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라는 거였어. 감기 걸린다고 말이야.

20160407_114344.jpg

“비 오는 날, 물장난, 물놀이하지 언제 해 보겠습니까?”
“빨리 아이들 데리고 교실에 들어가세요.”
“예?”
라고, 대답하고 사부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어.

창가에 매달려 다른 학년 다른 반 친구들은 일학년 별반이 노는 걸 부럽게 내려다보고 있었어.
“우리도 일학년 별반처럼 나가 놀아요.”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졸랐지만, 다른 교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놀 수 없었지. 놀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거든. 사부는 미리 문자 넣었어. 비 오는 날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물놀이하는 날이니까 사물함에 여벌 옷, 수건, 물티슈 넣어달라고 말이야.
다른 교사들은 일학년 별반이 하는 놀이를 못 보게 하느라고 창문을 쾅쾅 닫기 시작했어. 그리고 철컥철컥 잠갔어. 다시는 창문 열고 내다보지 못하게 말이야. 창문 내다 보면 위험하다고 겁까지 주면서.
교무부장이 부리나케 달려왔어. 민원이 들어오고 있다며 아이들 감기 걸리기 전에 어서 들여보내라는 거야. 신이 나서 노는데, 걸리지도 않은 감기 민원이 무서워서 놀이를 당장 중단하라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사부에겐 어림없는 소리였지.
“댐 건설 물놀이 한 번 하려고 물을 쏟아붓는다면, 수천만원 어치의 물로도 부족합니다. 자연이 준 선물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외받는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중한 순간을 어찌 교육의 기회로 삼지 않겠습니까? 나는 저 아이들과 놀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부는 단호하게 말했지.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거야.
“집에서 채 오 분도 안 되어 달려올 수 있는 학부모한테 문자 다 보냈습니다. 12시까지 여벌옷 아이들 책상 위에 놓아달라고.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위해 모두가 내 아이라고 생각해서...그 아이의 것까지... 입학식날 얘기한 겁니다. 학부모한테 다 동의 얻어서 지금 물놀이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했는데, 교감, 교무부장의 자리는 못내 불안한 것이었어. 하지만 교장은 달랐어. 놀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생각하고 있었어.
다음 해 일학년 별반 학부모는 가장 인상 깊은 교육 장면 중의 하나로 물놀이를 꼽았어. 36년 차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노는 모습...운동장에서 첨벙거리며 비에 젖는 모습, 놀이 후 아이들을 일일이 닦아주는 교사의 모습은 상식을 깨는 충격과 감동이었다고 교장 선생님한테 막 자랑했어.
그 놀이가 있고부터 학교장 생각이 확 바뀌었어.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하기 시작했거든. 그때부터 우리 학교는 놀이학교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조용한 변화였지. 생각의 전환, 그 변화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후에 비 오는 날이면 다른 반들도 나와서 물놀이를 했어. 비 오면 다른 학교는 텅 비는 운동장을 우리 학교는 노는 아들로 시끌벅적했어. 이 얼마나 보기 좋은 풍경이더냐? 다른 학교는 시도도 못하는 자랑거리가 되었지.
그후, 다른 반 교실 사물함에는 항상 여벌 옷이 준비되어 시작했어. 언제 신발 다 젖어보고, 온몸이 다 젖어보는 놀이를 해보겠느냐고. 모두가 낄낄대며 신나보겠느냐고?

20170417_103450.jpg

또 다른 놀이도 있었어. 한 우산 둘이 쓰기였지. 우산 하나를 둘이 쓰고 학교를 돌아보는 놀이였지. 가다가 사부 호각 소리를 들으면 우산 속 짝이 바뀌고 ...비 맞는 나무와 꽃들에게 말을 걸었지. 수수꽃다리 향기 진한 꽃그늘 아래에 사부와 사부의 반 친구들은 ‘한 우산 둘이 쓰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비가 와서 참 좋구나.”
“너랑 우산 함께 써서 참 좋구나.”
사부의 교육은 비 오는 날에는 교과서는 접고 우산을 펴는 거야.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보는 것. 짝이 되어 우산 속에서 함께 말을 걸어보는 것. 나무와 풀에게도 말을 걸어보고 눈을 맞춰보는 것. 지렁이들이 비를 피해 나오는 것을 관찰해보는 것. 작은 물도랑에 흩날리는 꽃잎이 둥둥 떠가는 걸 보는 것. 웅덩이에 종이배를 접어 띄워 보는 것... 비 오는 날 아주 많은 것을 해보는 거지. 친구들과 함께 했던 좋은 추억을 간직해 보는 거지. 교과서를 펴고, 영상을 보면서, 비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만이 교육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지.

“역시 멋진 샘이었어요.”
“이제 떼봐. 코피 멈춘 거야.”
“멈췄어요.”
“그럼 만두 얘기해 봐라. 비 오는 날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댐 만들자.”
수수꽃다리에 꽂혀 있던 친구가 바로 저라고요.
샘, 그때 댐 다 만든 다음, ‘한 우산 둘이 쓰기’ 놀이했잖아요. 학교 한 바퀴 도는 동안 좋아하는 짝꿍 생겼어요. 다 아시겠지만 누군지는 밝히지 않을게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아련하고 멋진 기억이에요. 평생 간직하고 싶은 기억 일 순위예요. 비만 오면, 미워했던 엄마, 가엾은 아빠 생각나서 힘들었는데, 이젠 아니예요. 비 오는 날마다 떠올리는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기억이 온통 차지했거든요. (계속)

......(만두의 두근두근 첫사랑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기대하세요.)

Comments

Sort byB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