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 이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던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본다.
金富軾(김부식)의 때 檀君의 神誌(단군의 신지)나
扶餘(부여)의 金簡玉牒(금간옥첩)이나
高句麗(고구려)의 留記나 新集(유기나 신집)이나,
百濟의 書記(백제의 서기)나
居柒夫(거칠부)의 新羅史(신라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는지 與否(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三國史記삼국사기』 引用書目(인용서목)으로 보면
『海東古記해동고기』·『三韓古記삼한고기』·『高麗(高句麗)古記고려고기』·
『新羅古事신라고사』·『仙史선사』·『花郞世記화랑세기』 等은
다 金富軾(김부식)의 及見(급견)한 것이며,
高句麗와 百濟(고구려와 백제)가 滅亡(멸망)하여
新羅와 渤海(신라와 발해)가 竝峙(병치)한 지 不過 二百年(불과200년)만에
高麗 王氏朝(고려 왕씨조)가 되었는즉
麗·濟·羅·渤(려,제,나,발)의 古碑 遺文(고비,유문)과
民間 傳說(민간전설)이 많이 遺傳(유전)되었을 것인즉
이것도 모두 採集(채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留記(유기): 소수림왕때 편찬되었다는 역사서, 100권이라 함
新集(신집): 영양왕때 <유기>를 다섯권으로 줄여서 쓴 책
영양(태)왕:(고구려 26대황제: 590~618)
及見(급견): 봤다.
竝峙(병치): 양립하다. 나란히 서다
遺文(유문): 생전에 쓴 글
遺傳(유전): 물려받아 내려옴
花郞世記(화랑세기): 신라 김대문이쓴 화랑에 대한 기록, 1980년대에 일부가 발견되어 전한다.
(옮기면)
김부식 당시에 단군의 <신지>나 부여의 <금간옥첩>이나
고구려의 <유기나 신집>이나,
백제의 <서기>나 거칠부의 <신라사>같은 것이 남아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삼국사기』 인용서목으로 보면 『해동고기』, 『삼한고기』,
『고(구)려고기』, 『신라고사』, 『선사』, 『화랑세기』 등은 다 김부식이 읽은것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여 신라와 발해가 나란히 선지 불과 200년만에
고려 왕씨의 조정이 되었는즉
려,제,나,발의 옛비석이나 남은 글들과 민간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니 이것도 모두 채집할 수 있었을거 아닌가?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단재의 지적은 너무나 명료하다.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어떤 사람인가?
백제의 멸망을 평가하는 글에 자신의 철학을
떳떳하게 밝혔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역사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라는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 '김'씨가 되었고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손이라 '고'씨가 되었다고.
당나라 천자의 말을 듣지 않고,
큰나라에 덤볐으니 멸망한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