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0(금)역사단편242. 역사 왜곡하기

neojew -

서경전쟁이 끝난후의 역사를 살펴본다.

八. 本戰役後(본전역후) 『三國史記』 編撰 (삼국사기편찬)
妙淸이 敗亡(묘청이 패망)하여 西京戰役(서경전역)이 結末(결말)되자,
金富軾(김부식)이 드디어
輸忠(수충)·定難(정난)·靖國(정국)·賛化(찬화)·同德功臣(동덕공신) 徽號(휘호)에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檢校太師(검교태사)·守太保(수태보)·門下侍中(문하시중)·
判尙書事(판상서사)·兼吏禮部事(겸사례부사)의 榮職(영직)에 또
集賢殿 太學士(집현전태학사)·監修國史(감수국사)의 文任(문임)을 맡아
高麗 當時(고려당시)의 國史(국사)를 監修(감수)하는 同時(동시)에
羅·麗·濟(나여제) 『三國史記삼국사기』를 編撰(편찬)하였다.
先儒(선유)들이 말하되,
三國의 文獻(삼국의 문헌)이 모두 兵火(병화)에 없어져
金富軾(김부식)이 考據(고거)할 史料가 不足(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編撰(편찬)한 『三國史記삼국사기』가 그렇게 疏漏(소루)함이라 하나,
其實(기실)은 歷代의 兵火(역대의 병화)보다
金富軾(김부식)의 事大主義(사대주의)가 史料를 焚滅(사료를 분멸) 한 것이다.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文任(문임): 조선시대 임금의 교문이나 대내외 문서를 담당하던 직책
監修(감수): 책의 저술을 지도 감독함
編撰(편찬): 엮어서 쓰다. 편집해서 책을쓰다
考據(고거): 참고해서 근거로 삼다
疏漏(소루): 거칠고 엉성함
焚滅(분멸): 불에태워 없애버림

(옮기면)

八. 본 전쟁후 『三國史記삼국사기』편찬
묘청이 패망하여 서경전쟁이 끝나자, 김부식이 드디어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휘호에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사 겸 사례부사의 영예로운 직책에
또 집현전,태학사,감수국사의 문서관련 직책을 맡아
고려당시의 <국사>를 지도감독하는 동시에
나-여-제『三國史記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선배학자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전쟁에 없어져 김부식이 참고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거칠고 엉성한 것이라 하나,
사실은 역대의 전쟁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불살라 버린 것이다.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단재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역사책을 간단하게 비교해 본다.


<출처:춘추좌씨전, 魯隱公二年, 庚申 B.C. 721> 공자의 기록이다.

2년 봄에 은공이 戎(융)과 潛(잠)에서 회합하였다.
여름 5월에 莒人(려인)이 向(향)으로 들어갔다.
無駭(무해)가 군사를 거느리고 極(극)으로 쳐들어갔다.
가을 8월 경진일에 은공이 戎(융)과 唐(당)에서 結盟(결맹)하였다.

라는 내용이다.
김부식의 기록을 살펴본다.

후연이라는 대륙에 있는 나라가 등장하고, 전쟁도 있었나보다.
국사편찬위가 주석을 달아놨다.

『진서』 모용희재기에는
“이때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燕郡, 다이링허[大凌河] 하류의 이시엔[義縣])을 공격하여
백 여 명을 노략하거나 죽였다(會高句驪寇燕郡, 殺略百餘人.)”라고 기술되어 있다.

김부식의 후예이자 식민사학자들이 점령한 한국사학자들이 달아놓은
어이없는 주석을 제거하고 다시 읽어보면

會高句驪寇燕郡, 殺略百餘人.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침략하여 백여 명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가 된다.
여기서 '會(회)'는 번역하지 않는다. 상투적으로 그냥 쓰는 단어다.

지명의 비정으로 놓고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다.
<연군燕郡> 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당대 고구려의 영토 또는 최소한 활동무대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비정을 하는데
한국의 사학자들은 어떻게든 과거의 영토를 좁히려고 몸부림친다.

오늘날 어떤 비리한 정치인들의 행위도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애교에 불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