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우) 高麗 末年(고려말년)에 至(지)하여
我(아) 水陸軍 都統制(수륙군도통제) 崔塋(최영)이
百戰百勝(백전백승)의 雄威(웅위)를 席(석)하여
大兵(대병)으로 遼瀋(요심)을 竝擧(병거)코자 할 時(시)가
卽又(즉우) 我 扶餘民族(아 부여민족)의
數百年 見失(수백년 견실)한 舊疆(구강)을 恢復할 時代(회복할 시대)거늘,
此時(차시)에는 又(우)
墻內(장내)의 權利를 相爭(권리를 상쟁)함에 汲汲(급급)하고
鴨綠 以外 壹步地(압록이외 일보지)를 索還(색환)치 못하였으니
此(차)가 何故(하고)이뇨 하면,
卽 金文烈(즉 김부식)이
渤海(발해)를 我史에 不著(아사에 불저)하여
鴨綠以外(압록이외) 數十萬方里 土地(수십만방리 토지)가
本來(본래) 我家土地(아가 토지)인 줄을 不知(부지)한 故(고)니라.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독립기념관제공>
雄威(웅위): 강한세력
席(석): 믿다
遼瀋(요심): 요양과 심양
竝擧(병거): 모두 공략하다
卽又(즉우): 곧 또한
見失(견실): 잃어버림
墻內(장내):담장 안쪽, 국내
相爭(상쟁): 서로 다투고 싸움
壹步地(일보지): 한발짝의 땅
索還(색환): 찾아서 돌려받음
方里(방리): ‘면적’을 말한다.
(옮기면)
또 고려 말년에 이르러
우리 수륙군도통제 '최영'이 백전백승의 강한 힘으로
요동과 심양을 함께 공략하고자 할 때가
곧 우리 부여 민족이 수백년간이나 잃었던
옛 영토를 회복할 시대이거늘,
이 때에는 또한 국내의 이권을 두고 싸우는데 급급하여
압록강 바깥을 한 발자국도 찾아내 돌려 받지못 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면
곧 김부식이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하지 않아
압록강 바깥 수십만리 땅이
본래 우리의 땅인 줄을 알지 못 했던 까닭이다.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모든 일에는 실력과 함께 운이 필요한 것이다.
원나라가 망하는 대혼란기에
하필이면 큰 꿈을 가진 인물들이 없었으니
운이 없다고 할 수 밖에.
게다가..역사인식의 한계가 더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