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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갤러리] 잘 가라, 냉장고! 아팠던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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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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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onths agoSteemit2 min read

▲6월 13일 수거 예정 냉장고(폐가전 전구 1599-0903)

지금의
여인숙갤러리는
리모델링하다가 망한 집이었습니다
경매로 주인이 바뀌기까지
삼 년 간 방치된 폐허였습니다
발 딛을 틈 없는 쓰레기 더미였습니다

둘째 동생과 불화로
어머니 집에서 쫓기듯이 나와
폭설, 혹한에 발과 손이 시린
지난 겨울
오갈 데 없이 막막하고 삭막할 때
처음 이 집에 들어 섰을 때
나를 반긴 친구가 바로 고장 난 냉장고였습니다

떡 하니 내가 냉장고로 서 있는 거였습니다
여기저기 까이고 파이고 녹슬고
문 열 때마다 부러진 이음새는 맞아서 부러진 내 갈비뼈였습니다
따귀를 맞거나 걷어 차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냉장고
나를 쏙 빼 닮은 냉장고 녀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덩치가 너무 커서 혼자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황지 여인숙 이 층
폐허를 둘러 본 나는
주인님께 수리해서 쓰겠다고 했습니다
세를 얻어 청소부터 시작했습니다
창틀에 쌓인 먼지를 닦고
얼어 터진 수도를 고치고
화장실 변기통에 묵어서 말라 비틀어진 똥을
물로 축여 녹이고 닦고 내리면서
한없이 처량한 냉장고와 대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하다 지치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냉장고였습니다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 없는 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냉장고를 보면서
쓰레기로 가득하고
곰팡이 냄새로 케케한 여인숙을 고쳐가면서
한겨울에도 이마에 땀과 매운 눈물을 훔치며 웃고 있던 나는
폭력으로 얼룩진 재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만 입고 폭력으로부터 탈출했던 그 곳을
잊기로 했습니다
끝없이 추락하고 무너지는 나를 이기기로 했습니다
냉장고를 끌어안고 울면서 이혼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방치 된 폐허를
여인숙갤러리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 문을 열듯 냉장고 문을 열고
냉장고 내장을 하나씩 꺼내 재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포기하지 못한 내 삶도 추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때는 냉장고처럼 신체 기증을 하는 나를 생각했습니다

"잘 가라, 냉장고! 아팠던 나여."


▲식탁으로 재활용한 냉장고

▲남자 화장실 정리함으로 활용한 냉장고

▲싱크대 정리함으로 재활용한 냉장고


▲용구 보관함으로 재활용한 냉장고

▲둥글레 화분으로 재활용한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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