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는 평화의 섬 제주가 좋아서 이주했다는 말을 강연 중에 100여번은 뱉었다.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과 다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단히 강조했다. 알고보니 같은 동네 주민이었고 인연이 되어 잡담할 기회가 생겼다. 4·3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토벌대가 서너 살 아이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게 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는 빌레못동굴이 근처에 있다, 뭐 그런. 하지만 평화의 섬 제주를 사랑한다는 다정한 이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왜 어두운 이야기만 해요?”
종종 마주하는 풍경이다. 부모가 돌아가며 그림과 악기를 가르치는 그룹에서, 나는 독서토론을 하곤 했다. 제주에 살지만 제주의 역사를 잘 모르는 육지 사람들, 게다가 아이들에게 4·3은 매우 바람직한 소재였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공부하며 다정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보호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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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역사는 이념의 과잉이 원인이기에 쉽게 공론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라는 말 아래에서라도 그렇다면 의아하다. 제주예찬을 마다하지 않는 공간에서도 찬밥 대우라면 황당하다. 그 작가에게 평화란, 조용하고 공기 좋은 시골동네였다. 그 모임에서 긍정이라는 건, 비판적인 접근을 싫어하는 거에 불과했다. 문제없는 말들만 오가니 서로는 늘 아껴준다. 다정함의 민낯, 긍정의 배신, 친절함의 역공이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좋은 단어만 나열하면, 필시 무엇을 짓누른다. 다정한 사람이 좋다. 그래서 다정한 글쓰기가 좋다는 식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자, 장점만 말하자, 비판적으로 글 쓰는 건 도움이 안 된다, 꼭 저런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야 하냐 등으로 확대된다. 제주만의 모습이겠는가.
이 일 뿐만이 아니라도, 조용히 넘어가면 되는데 왜 그러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곤 합니다.
얼마 전 박경석 대표가 말하더군요. 지하철이 “노동력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벨트 같다”고요. 컨베이어벨트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지만 그 폭력을 당하는 데도 자격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 사회는 이윤 증식에 적합한 이들만을 ‘쓸모 있는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지하철은 이 수단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착취열차’죠. 이 열차가 멈추면 이 체제를 움직이는데, 그러므로 곧 여러분을 착취하는 데 문제가 생기니 거기서 누가 죽어 나가건, 그래서 이 사회가 얼마나 망가지건, 언제나 열차는 정시에 맞춰 내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모르는 이 질주가 정말 ‘우리’를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들’이 신봉하는 성장을 위해서죠. 우리는 그저 그 성장의 환상이 요구하는 시간성에 몸을 끼워 넣고는 저들이 먹다 남은 콩고물을 주워 먹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장에 하등 쓸모없다 치부된 이들은 이 ‘착취열차’에 올라탈 수조차 없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착취열차’는 동시에 누군가에 대한 ‘배제열차’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하철은 그런 의미에서 참 상징적입니다. 물론 지하철은 그간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 죽어도, 넓은 승강장 간격에 바퀴가 빠져 바닥에 나뒹굴어도, 매번 나만 내버려 두고 떠나도 아무 일이 없던 곳이었기에,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은 ‘쓸모 있는 몸’들을 분류해 착취의 현장으로 ‘운반’하고, ‘쓸모없는 몸’들은 바깥으로 내쫓아온 이 사회의 ‘피 묻은 일상’을 재생산하는 젖줄이기도 하죠. 실제로 이곳의 일상은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매 순간 억압과 차별을 재생산합니다. 억압과 차별이란 게 대부분 그래요. 여러분이 나빠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일상이 그 자체로 그것을 나도 모르게, 그러나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죠. 그 피해자는 장애인들이기도 하지만, ‘착취를 당하기 위한 시간’ 단 몇 분이 늦어졌다고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비장애인 노동자 여러분이기도 합니다.
어느새 주말이 끝나갑니다.
쌓인 일을 빨리 처리하고 주말을 마무리하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